지주층은 점차 자본주의체제에 적응해나기 위해, 이 체제의 주역으로 계속 존속하기 위하여 지주 겸 산업자본가로 변신해가고 있었다.
지주층의 자본주의체제에 적응 과정은 농민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처지가 더욱 열악해져감을 의미하였다. 일제하의 소작농민들은 농업 경영에서의 위치 또한 농업
지주계급의 지나친 횡포, 부채의 증가, 소작농으로 전락된 대다수의 농민들이 갖고 있는 절망적 세계관등 농촌이 안고 있는 문제는 정신적, 경제적으로 대단히 심각한 양상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김현자, 「상록수 고」, 태능어문, 서울여자대학교, 1983, p.7.
동아일보와 계몽운동에 직접 참여했던 사
지주와 자작농은 토지소유 규모에 관계없이 모두 흑자를 나타낸 반면 소작농은 3정보 이상 경작해야 흑자를 얻을 수 있었는데 그 비율은 소작농 호수의 9%에 지나지 않았다.
농가의 수지적자는 부채를 유발할 수밖에 없었다. 1930년에 조선 총독부의 조사에 따르면소작농과 자소낙농을 합한 2,247,194호
제2절 남한의 토지개혁의 배경
1. 북한의 농지개혁
1940년대 후반에 남한 전체 인구의 70.9퍼센트가 농민이었으며, 그중 80퍼센트 이상이 소작농 내지 자작농이었다. 당시 농민은 두 가지 정치적 태도 사이에서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그들은 소작지를 매개로 한 지주 및 그들의 이해를 대변하던 한민당
소작농민으로 전락하였을 뿐 아니라 중소지주조차 몰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직 일본인 지주 등 상당 재산을 갖춘 대지주만이 이 사업을 통해 토지소유를 확대할 수 있었다. 산미증식계획이 진행되면서 소작농민 수탈도 한층 강화되었다. 지주들은 수리조합비를 소작농에게 떠넘겼으며 생산과정에